<명구> 終身學道, 而不可與入堯舜之域, 皆於鬼神之說, 有所不明故也.
<해석> 평생토록 도(道)를 배우지만 요순(堯舜)의 경지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모두 초월적 존재들에 대한 이해에 밝지 못함이 있기 때문이다
<내용> 다산 정약용의 사상 이해를 위한 핵심 개념들이 실학(實學)과 서학(西學)이라는 데에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리학적 세계관에 의문을 제시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용적 학문을 강조했던 다산, 그에게 서학으로 대변되는 천주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다시 말해, 다산이 천주교의 어휘들을 받아들이고 활용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산이 천주교의 어휘를 자신의 사상체계에 흡수한 이유는 예수회의 보유론(補儒論)이라는 선교 논리에 공감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사상에 엿보이는 천주교적 세계관과 가르침은 천주교 신앙 자체의 전파를 위해서가 아니라, 유학적 가르침을 보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고 활용했다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산이 성리학적 사상체계의 근간인 이기설(理氣說)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의문을 제기하고, 선진시대 공자나 맹자 등에 의해 절대시되었던 천(天)의 권위에 근거한 사상체계를 정립하려는 그의 시도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천주교의 신앙적 어휘와 다산의 핵심 어휘인 실학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이에 대한 실마리는 다산이 1814년에 집필한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저작에서 천은 만물을 주재하며 인간사 모든 것을 통찰하는 인격적이며 초월적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나아가 천이 인간에게 부여한 품성은 영명(靈明), 즉 신령스럽고 밝다는 것을 언명하고, 사천(事天), 즉 천을 섬기는 것을 인간사회 도덕의 출발점으로 명시되고 있다. 다시 말해, 다산은 인간이 도덕성을 실현할 수 있는 기본 조건으로 천, 상제(上帝), 귀신(鬼神) 등으로 표현되는 초월적 주재자에 대해 삼가고 두려워하는 신앙적 태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입장은, 인간 행위를 상벌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천이 인의예지(仁義禮智) 등의 덕성들이 인간의 내면에 선천적으로 내재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후천적 덕목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겠다.
요컨대, 다산이 천주교적 세계관을 자신의 도덕체계에 활용한 이유는 도덕 이론의 실학적 접근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아울러 유학적 도덕체계 진술에 유학과 다소 이질적인 천주교 어휘들을 적극 활용한 접근과 도덕행위의 실천성 강조는, 공자 맹자 등이 지닌 시대와의 소통을 통한 해법 추구와 실천 윤리적 측면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성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대에 나름의 도전장을 내민 다산의 다소 파격적 접근과 체계는, 전통이 지닌 풍부한 가치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새로운 변화와 요구에 민감하게 호응하는 사고의 융통성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환기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
<출전> : 『與猶堂全書』,『中庸講義補』
<집필자> : 이용윤 /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