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구>
陽春之曲和者必寡.
<해석>
고상한 곡조는 화답하는 이가 반드시 적다.
<내용>
얼마 전 지인들과 저녁 약속이 있어서 술도 한잔 할 겸해서 인사동 식당엘 들른 적이 있었다. 식당의 한쪽 벽에 걸려있는 ‘曲高和寡’라 적힌 멋진 서각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한자 그대로 읽으면, ‘곡조가 높으면 화답하는 이가 적다’로 읽히는데, 여기는 음식점이니 다른 손님에게 방해되지 않게 큰 소리로 대화하는 것을 조심해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술 마시고 큰 소리로 노래하지 말아달라는 것인지? 아무튼 은근한 방식으로 주인의 당부를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에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 마시고 큰 소리로 노래를 해대거나, 고함지르고 싸움판을 벌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화 시민으로서 우리의 질서 의식을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긴 하다.
‘陽春之曲和者必寡’는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의 문장가 송옥(宋玉)의 말이다. 그는 당시에 유려하고 고상한 문체로 유명세를 떨치던 인물이다. 그의 문장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어서 보통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고 칭찬하는 이도 드물었다고 한다. 초나라의 왕이 송옥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대체 어째서 그대의 문장을 칭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오?’ 송옥이 대답했다. ‘어떤 가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길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통속적인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위 사람들 대부분이 이해하고 따라 불렀습니다. 이어서 조금 수준 높은 노래를 부르자 따라 부르는 사람이 훨씬 적어졌습니다. 좀 더 어려운 노래를 부르자 불과 10여 명만이 따라 불렀습니다. 아주 어려운 노래를 부르자 두세 명만이 따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봉황(鳳凰)은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구름 위를 나는데, 동네 울타리를 날아다니는 참새가 어찌 하늘의 높음을 알겠으며, 어항 속에 사는 작은 물고기가 곤(鯤)이라는 큰 물고기를 어찌 알겠습니까? 이는 새 가운데만 봉황이 있고, 물고기 중에만 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선비 중에도 이런 경우가 있지 않겠습니까?”라 대답했다고 한다. 송옥은『장자』 「소요유」의 우화를 인용하고 있다.
이 글은 현대 미학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문제를 제공한다. 전통적인 동양의 미학에서는 문인 사대부 취향의 ‘고상한 아취[雅]’를 강조해 온 반면에 ‘저속한 취향[俗]’을 폄하해왔다. 이것은 청나라에 이르러 ‘아속논쟁(雅俗論爭)’을 불러 오면서 실제로 동양의 역사에서는 지배계층의 취향을 대변하는 ‘아(雅)’의 우세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유행한 풍속화를 보면 세속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맥락에서 회화에서의 ‘속(俗)’의 경향, 즉 대중화가 움트기 시작된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더불어 해체론이 주도하는 현대 미학에서는 더 이상 ‘고상함’이 최상의 심미 가치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고상함’을 중시해 온 동양의 전통적인 미학이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가는 깊이 생각해 볼 문제를 남긴다.
문화적으로는 대중성이 부상하고, 예술 분야에서도 개성과 창의성이 중시되면서 다양화의 경향을 띠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예술은 서양과 동양, 고상함과 세속적이라는 가치 구분이 모호해지는 융복합의 경향이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점유하게 되면서, 예술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다양성의 가치는 예술의 목표가 일종의 사람의 마음 작용을 환기시킨다는 맥락에서 예술 창작에서 도덕적 해이를 인정하는 것은 분명 아니고, 세계가 요구하는 객관적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는 점을 저버릴 수 없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출전> : 『문선(文選)』 「대초왕문(對楚王問)」
<집필자> : 임태규/성균관대학교 예술학부·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