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구> 觀雞雛. 此可觀仁.
<해석> 병아리를 보아라. 여기에서 仁을 볼 수 있다.
<내용>
따뜻한 봄볕이 초등학교 하교 길에 내리쬐면, 길모퉁이에서 박스 한가득 노란 병아리 떼를 담아 파는 사람이 있곤 했다. 동그라니 그 작고 노란 생명체를 보기 위해 수많은 아이들 모여들어 서로 몸싸움을 벌이고, 쌈지 돈은 꺼내 작은 손에 올려놓고 사가기도 했다. 병아리를 사간 아이는 마음을 다해 돌보고 키우지만, 얼마 못 가 그 작은 생명체는 아이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이내 죽고 만다. 슬픔에 젖은 아이는 흐느끼며 뒷산에 묻어주며 다음 세상에는 좋은 곳에서 만나자고 기원하기도 한다. 아이는 무엇 때문에 병아리에게 이 정성을 쏟았을까?
“병아리를 보아라.” 공자 이래 유학이 끊임없이 던져온 ‘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호(명도선생, 1032-1085)는 이렇게 대답한다. 정호는 짧지만 강렬하게 우리의 경험을 자극한다. 그것은 이성적 추론이 아닌 감성의 심연을 파고드는 언어다. 아이처럼, 우리는 아무런 계산 없이 생명에 대해 끌리는 느낌을 가진다.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피어난 새싹에게서, 콘크리트 바닥의 틈을 비집고 자라난 잡초에게서, 갓 태어나 제 스스로 먹이를 찾지 못하는 어린 것들에게서, 또 병들어 쇠약한 환자의 가냘픈 맥박에서 느껴지는 생명력. 우리로 하여금 애정 어린 관심과 희생을 동반하는 보살핌을 자연스레 이끌어내는 이 느낌을, 그는 ‘仁’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에 대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원초적 느낌이다. 그 원초적 느낌은 우리가 본래 도덕적 존재임을 자각하도록 한다.
정호는 ‘仁을 아는 것(識仁)’이 배우는 자의 급선무라고 하였다. 仁을 안다는 것은 이런 생명의 느낌에서 스스로 도덕적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굳이 모든 존재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라는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우주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주변의 사소한 생명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온 우주가 그리고 나 자신이 ‘仁’을 간직한 존재임을 느낄 수 있다. 신유학의 숱한 논쟁과 학파 간의 경쟁 속에서도, 유독 정호에 대해서만은 모든 유학자들이 존숭하며 자기 사상의 근거로 제시해왔다. 감성의 언어로 사람을 깨우치며 유학의 본원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의 문장이 가진 힘을 모든 이들이 빌리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봄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다면 주위에 솟아나는 생명의 약동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본성을 발견하는 것도.
<출전> : 『河南程氏遺書』 卷3
<집필자> : 이현선/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