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구>
大哉. 問!
<해설>
크도다. 물음이여!
<내용>
이것은 『논어』에서 공자가 임방(林放)의 질문을 크게 칭찬하면서 한 말이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질문이었으며 공자의 대답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의 질문을 스승이 높이 평가하였다는 그 사실이다. 공자 정신의 본령을 가장 잘 드러내는 『논어』를 보면 제자와 스승간의 문답식(問答式) 내용이 꽤 된다. 아마 틀림없이 공자의 문도(門徒) 사이에는 의문 나는 것을 기꺼이 스승에게 물어볼 수 있는 매우 개방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인은 유교 교육이라고 하면 서당식 교육을 연상한다. 그것의 특징은 사제간(師弟間)에 경전 이해와 암기를 위주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방 통행적인 주입식 교육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교육의 가장 큰 한계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런 영향 탓인지 몰라도 지금의 우리 교육에서도 질문의 실종현상이 심각하다.
공자는 피교육자 스스로의 자각과 노력을 강조하여 ‘한 모퉁이를 들면 세 모퉁이에서 반응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삼우지반(三隅之反)을 강조하였다.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가장 의미 있는 반응이 질문일 것이다. 질문은 모르는 것을 이해하고 이것을 더욱 심화시켜서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해서 불가피하다. 본래 유교에서 말하는 배움이란 학문(學問)으로서, 여기에는 질문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공자의 계발(啓發)식 교육이라는 것도 문도의 거듭된 문답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을 심화시켜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공자 교육의 본령을 염두에 두고, 가정과 학교 교육에서 그 동안 실종되었던 질문을 회복하고 활성화 시키는 일에 발 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한국인은 자녀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가”를 묻는데 비해서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는 유태인들은 “무슨 질문을 했는가”를 물어본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이 고도의 창의성 발휘여부를 재는 척도라고 본다면, 높은 지능지수를 자랑하는 한국인이 노벨상 수상에서 부진(不振)을 면치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대로 된 문제의식의 부재(不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크게 물어야 크게 들을 수 있고, 그래야만 크게 통할 수 있다. 이것을 대문(大問)-대문(大聞)-대문(大門)의 ‘삼대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강렬한 문제의식을 수반한 큰 물음 곧 ‘대문(大問)’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작고 사소한 질문들이 모였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교육에서 질문이 활성화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에 유교를 공부하는 이 시대 대학생들도 스스로 묻기를 좋아하는 습관을 형성하여 각자의 가슴속에 ‘대문’ 하나씩을 품고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출처> : 『논어(論語)』 「팔일(八佾)」
<집필자> : 손병욱/경상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