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구>
見侮不辱
侮(모): 업신여기다 辱(욕) 치욕스럽다.
<해석>
업신여겨도 치욕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마다 예민한 주제가 다를 수 있다. 학력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흥분해서 따지는 사람도 있다. 반면 자존심은 평소 점잖은 사람도 흥분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주제이다. 오죽하면 맹자는 거지도 자존심이 있다고 말했다. 거지가 음식을 구걸해도 누군가가 음식 그릇을 발로 툭툭 차면서 건네면 그 음식을 받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렇다 보니 자존심은 사람과 사람 또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송견은 허구한 날 전쟁을 벌이는 싸우는 나라들의 시대, 즉 전국(戰國) 시대를 살면서 사회 갈등과 대립의 원인이 자존심의 상처에 있다고 보았다. 보통 사람이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 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모욕을 받으면 자존심이 훼손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이를 한자로 표현하면 견모위욕(見侮爲辱)이 된다. 다른 하나는 모욕을 받더라도 나에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이다. 이를 한자로 표현하면 견모불욕(見侮不辱)이다. 송견은 사람이 전자가 아니라 후자로 반응한다면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지리라고 보았다.
견모위욕과 견모불욕은 상식적인 반응과 숙고된 반응의 차이로 볼 수 있다. 견모위욕은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양상이다. 반면 견모불욕은 모욕을 당하더라도 그 원인을 곰곰이 따져서 자신에게 그럴 이유가 없다면 시쳇말로 “똥 밟았다”는 반응을 보이며 그냥 넘어가는 일이다. 자칫하면 송견의 견모불욕은 근대 루쉰이 말했던 정신승리법으로 치달을 수 있다. 가해자는 반성하지 않는데 피해자가 용서했다고 나서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견모불욕은 사실 보통 사람으로서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싸울 일이 많이 줄어들 듯하다. 그래서 송견의 주장은 “모욕을 당하더라도 모욕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사람들 사이의 싸움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견모불욕(见侮不辱), 구민지투(救民之鬪)”로 정리되었다.
과연 송견의 견모불욕은 싸움의 시대에 적절한 해결책으로 충분할까? 부분적으로 좋은 해결책일 수 있지만 모욕을 주는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당하는 사람이 참는 방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순자는 송견의 견모불욕이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즉 고통의 원인을 낳는 당사자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고 피해를 받는 행위자가 감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견모불욕의 두둑한 배짱만큼이나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엄을 지키는 의식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출전> 『장자(莊子)』 「천하(天下)」
<집필자> 신정근 / 성균관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