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구> 至於思表纖旨, 文外曲致, 言所不追, 筆固知止
纖(섬): 자세하다 미묘하다, 旨(지): 뜻, 追(추): 따르다, 筆(필): 붓, 止(지): 멈추다
<해설>
사고 범위의 너머(밖)에 있는 미묘한 뜻과 문학적 표현의 너머에 있는 변화하는 정취의 경우에 언어가 따라갈 수 없는 것이므로 붓이 참으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감성 영역의 예술을 이성적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표현을 하더라고 그것에 대해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기 어렵고, 또 견해가 다르더라도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종영(鍾嶸, 468?~518)은 『시품(詩品)』에서 “기는 사물을 움직이고, 사물은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 이 때문에 사람의 성정이 흔들리고 기울어져서 춤과 시가로 나타난다[氣之動物, 物之感人, 故搖蕩性情, 形諸舞詠].”고 했다. 이처럼 종영은 ‘기→사물→감정→시가/춤’의 순서로 시가와 춤창작의 과정을 말했는데, 다른 예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예술창작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니 매우 간단한 듯하다. 하지만 한 단계 한 단계를 거칠 때마다 수많은 취함과 취하지 않음의 복잡하고 미묘한 선택과정을 수없이 거친다.
춤창작의 경우만 보더라도 안무가의 사유 속에 둘 이상의 요소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섞이기도 하고 변환되기도 한다. 수없이 많은 종합과 조화 그리고 변증을 거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가서 선택되고 그 과정이 반복된 결과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안무가의 목적은 그 움직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움직임을 통해 움직임 너머의 무언가를 전하고자 하는 데에 진정한 뜻이 있다. 즉 實을 통해 虛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사공도(司空圖, 837~908)가 말한 ‘상외지상(象外之象)’의 경지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춤은 기세는 가득하되 표현은 과장되지 않아야 한다. 어떤 부분들은 핍진하게, 어떤 경우는 더 이상의 표현을 하지 말아야 한다. 유협(劉勰, 466~520)이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至於思表纖旨, 文外曲致, 言所不追, 筆固知止.”고 한 말이 바로 그와 같은 경계일 것이다. 움직임의 절제가 도리어 묘경(妙境)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한편 운향(惲向)은 그림을 논하면서 “한 번의 붓질로 만 번의 붓질을 간직해야 한다[以逸劃藏萬筆].”고 말했는데, 이 말은 쉼 없는 반복 훈련을 통해 높은 예술적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여러 번의 붓칠을 지양해야 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춤창작자에게 요구되는 것도 만 번의 허우적거림이 아니라 만 번의 움직임을 간직한 한 번의 절도 있는 손끝일 것이다. 의미 있는 한 번의 움직임은 만 번의 움직임을 연마한 후에 나올 수 있기에, 이 점이야말로 ‘무경(舞境)’을 일으키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필고지지(筆固知止)”는 예술의 영역에서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멈춤[止]은 요청된다. 치닫는 욕망에 멈춤[止]을, 솟구치는 탐욕에 멈춤[止]을, 끝없는 오해에 멈춤[止]을, 남을 비난하는 말의 멈춤[止]을 내 삶에 초대한다면, 세상사 너머에 있는 미묘한 뜻과 정취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출전> 『文心雕龍(문심조룡)』
<집팔자> 김미영/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