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는 마음이 넓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 이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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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2-22
선비(士)는 그저 한 가지 전문지식에만 능통한 테크노크라트를 의미하지 않는다. 선비란 학문과 더불어 원대한 포부와 굳센 도의감을 두루 갖춘 ‘시대의 등불’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에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로 간주되었다. 선비가 없으면 그 나라의 도의와 양심은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명말의 황종희는 자기 나라가 청이라는 이민족에게 망하게 된 것은 국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선비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선비는 모름지기 뜻이 넓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좁은 지식만 소유한 테크노크라트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원대한 청사진을 그려주기에는 시야가 너무 좁고 도의감도 부족하다. 요즘의 지식인들은 오로지 자신의 성공과 가족의 안위만을 위해 지식을 상품화하여 시장에 내놓는 지식 판매꾼들이다.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바람직한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는 선비가 많아져야 한다.
선비는 우선 뜻이 넓어야 한다. 모든 대립되는 의견과 주장을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는 도량이 필요하며, 갖가지 전문지식과 세분화된 사회영역을 하나로 관통할 수 있는 종합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그러나 넓음(弘)만으로는 안된다. 내면에 도의와 양심을 간직하고 어떠한 불의와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려는 굳셈(毅)이 있어야 한다. ‘굳셈’이 없다면 ‘넓음’은 그저 무골호인 식의 ‘사람좋음’으로 그치게 될 것이다. 넓음과 굳셈, 그리고 강인함과 부드러움은 음과 양처럼 더불어 공존하면서 서로를 지탱하게 해주는 선비의 덕목이다. 선비의 어깨는 무겁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弘(홍): 넓음, 포용력이 큼. 毅(의): 굳셈, 강인함.〕
# 출전: 『논어』「태백」
# 내용소개: 이승환(고려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