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화합하되 뇌동하지 않으며, 소인은 뇌동하되 화합하지 못한다.
- 김기현
- 조회수11673
- 2005-06-24
사람들 가운데 소인(小人)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인의 성향을 갖고 있다. 유교의 통상적인 관념에 따르면, 소인은 이익 및 이권[利]을 좇는다. 자신에게 이로우면 옳다고 하고 지지하며,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 없으면 방임하거나 반대한다. 인간의 이런 성향을『논어』에서는 和而不同(화이부동)의 ‘同’으로 말하고 있다.『춘추좌전』소공 20년조에는 ‘同’과 ‘和’의 차이에 관하여, 임금이 좋다고 하면 무조건 좋다고 말하고, 임금이 좋지 않다고 하면 무조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同이고, 임금이 좋다고 하더라도 혹시 좋지 않은 면이 있을 때는 그것을 말하여 검토하거나 시정하게 하고, 임금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혹시 좋은 면이 있거든 그것을 말하여 그 좋지 않은 면을 제거하게 하는 것은 和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자신의 주견이나 나름의 공정한 기준에 의거하지 않고, 단지 상대방이 강자이기 때문에 아첨하거나 자신에게 이익을 줄 것이기 때문에 동조한다면, 필연적으로 편당을 짓게 되어 사회 전체의 구성원들 가운데 이 무리를 제외한 다른 구성원들에게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결국 다양한 입장의 경합과 공존이 아닌 ‘패거리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不和(불화)이다.
때로는 ‘사람들이 다 그러는데 나 혼자만 고집피울 필요 있을까’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수가 있다. 이 경우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기권의 입장을 제외하면,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의 길을 가게 된다. 하나는 ‘세상이 다 그러니까 나도 어쩔 수 없다’로 흐르는 경우다. 『중용』에서는 이것을 和而不流(화이불류)의 流로 말한다. 이렇게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는 사태를 막으려면 내면으로 강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중용』에서 강함[强]을 자세히 논한 뒤에 “그러므로 군자는 和而不流하나니, 强哉矯(강재교)여!”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라 하겠다. 다른 하나는 사회를 등지거나 사회를 부정하는 경우이다. ‘모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는 개의치 않는 인격이 되기를 기대하지만, 지식인의 피세(避世)나 사회 부정의 태도에는 반대한다. 설사 세상이 아무리 엉망으로 돌아가더라도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和의 정신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 출전 : 『논어』「자로」
# 내용 소개 : 김기현(전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