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는 보았고, 양은 아직 보지 못하였다.
- 김세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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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5-12
어느 날 양혜왕은 마루에 앉아 있다가 흔종(釁鐘: 완성된 종에 소의 피를 바르는 의식)을 위해 끌려가는 소를 보게 된다. 죄 없이 사지(死地)로 끌려가며 두려워 우는 소를 본 양혜왕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소를 양으로 바꾸도록 명령한다. 많은 백성들이 그러한 양혜왕의 행동을 큰 소가 아까워 작은 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며 쩨쩨한 임금이라고 원망하였다. 하지만 맹자는 도리어 이러한 양혜왕의 마음이 바로 인을 행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소를 양으로 바꾸라는 양혜왕의 명령은 분명 편파적이다. 두려워 울며 끌려가는 소가 불쌍한 만큼 양에게도 측은지심은 똑같이 발휘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의 생명권을 인정한다면 양의 생명권도 인정되어야 할 터이다. 그런데 왜 맹자는 소를 양으로 바꾸라는 양혜왕의 논리를 인을 행하는 방법, 왕도정치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판단한 걸까?
서구 근대 철학에 입각한 정의의 윤리에서 주체들은 모두 동등한 권리를 지닌 개별 존재로 이해되며, 어떤 주체도 특권을 가질 수 없다. 정의와 공평성을 도덕 원리로 채택하는 가운데 편애성(partiality)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는 그 자체로 모순적이며 불순하다. 권리의 측면에서 정의의 문제를 논의할 때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편애성은 결코 도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편애성은 공평무사함과는 상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편애성이 비판받는 이유는 공평무사하지 않다는 것, 공정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일상에서 과연 공평무사함은 언제나 공정하며 평등성을 담보하는가? 편애성은 항상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가? 여성 고용할당제 법안,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법조항 등은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편파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무사공평성(impartiality)의 원칙을 어긋나는 ?痼?아니며, 따라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다. 특별한 관계에서 사적으로 일어나는 감정 모두를 평등성, 불편부당성, 상호성 등을 보장하는 보편적 원리와 정면으로 대치시킬 수 없음이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를 할 수 있는 마음, 인을 행하는 방법일 것이다.
맹자의 측은지심은 분명 눈앞의 광경에서부터 도덕심을 출발시키지만 그 도덕심이 단지 사적 감정의 측면에 제한되지는 않는다. 희생으로 쓰일 소가 두려워 벌벌 떠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양으로 바꾸라고 명령하는 양혜왕에게 재물을 아낀다고 원망하는 백성들과는 달리 맹자는 그것이 바로 왕도정치를 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라 평가한다. 이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구체적 경험, 그리고 특별한 관계에 있는 존재를 특별한 위치에 놓고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 모두가 사적 감정에 기반한 제한된 도덕 지침을 마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눈앞에서 두려워 떠는 소의 모습을 보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단지 사적 친밀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보다 먼 관계, 공적 영역에까지 미치게 하는 도덕심의 발로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도덕 원리를 적용하고자 할 때, 또는 비슷한 상황에 동일한 원리를 적용하고자 할 때, 개인이 지니는 특수성이나 상황의 맥락에 따른 미묘한 차이들은 간과되어 버린다. 공평성과 보편성이 이상적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허구일지 모른다. 공평성과 보편성의 이상에 따를 때 여성, 유색인종, 노약자, 장애인, 빈곤층 등 사회적 주변인의 생각이나 경험은 곧잘 무시되기 때문이다.
친친(親親)은 특정한 관계 안에서 당사자들의 필요를 고려하므로 편파적이 될 위험성이 많다. 하지만 공평성의 이상(理想)이 사람들을 동일한 개인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개인들의 차이를 형평성 있게 고려하는 것이어야 하며 보편성 역시 개별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생한 방식으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출전: 『맹자(孟子)』 「양혜왕상(梁惠王 上)」
#내용소개: 김세서리아 (성신여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