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되 무력을 쓰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 윤훈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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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25
공자가 말했다.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되 무력를 쓰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의 어짊만 하겠는가? 누가 그의 어짊만 하겠는가?” 이 말은 공자께서 자로(子路)를 위시한 제자들과 역대 인물들에 대해 논평하는 자리였던 것 같다. 자로는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으로 환공을 보좌하여 패자(覇者)의 자리에 오르게 했던 관중을 거론하였다. 관중은 비상한 부국강병책을 펼친 유능한 정치가로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또한 친구인 포숙(鮑叔)과 더불어 우정 그 이상의 관계 맺음을 뜻하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했다. 자로는 최고의 문제 인사를 내세워 그때까지 배운 것을 점검하며 스승의 뜻을 확인해 보려 했다. 관중은 공도 컸으나 잘못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위하기 이전인 공자 소백(小白) 시절 관중은 라이벌이었던 공자 규(糾)를 섬겼다. 심지어 활로 환공을 쏘아 죽이려 했다. 숨막히는 경쟁 끝에 승리한 환공은 공자 규가 망명했던 노나라에 압력을 가해 죽이게 했다. 그리고 그의 측근인 소홀과 관중을 즉각 압송할 것을 요구했다. 소홀은 주군에 대한 충성과 의리, 그리고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이유로 자결했다. 하지만 관중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죄인을 호송하는데 사용했던 함거(檻車)를 타고 갔다. 스스로 죄수임을 표하면서 관대한 용서를 바랬던 것 같다. 위급한 상황에서 환공의 측근이었던 포숙의 간절한 구원에 힘입어 살아났다. 나아가 재상까지 출세했다. 이런 관중의 모습을 놓고 숱한 논란이 일었을 것이다. 극단적인 평가가 오갔을 것이다. 자로는 당연히 나쁜 쪽에 섰을 것이며 확인을 위해 스승에게 질문했다. 그러나 공자는 뜻밖에도, 자로는 물론 후대의 유학자까지 의구심을 들게 했을 ‘관중이 어질다’는 평을 내렸다. 그것도 두 번 반복했다. 어떻게 관중에게 최상의 평가가 가능한지 궁금할 뿐이다.
그 근거로 무력을 쓰지 않았음을 들었다. 관중은 제나라를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인 수단, 즉 설득과 위세 등으로 제후들을 규합했다. 강한 군대를 거느렸으나 쓰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가로서 정말 힘든 결정이다. 전쟁으로 점철된 춘추시대는 말할 나?㏊?없고 오늘날에도 어려울 것이다. 평화를 통해 얻은 안정은 힘없는 백성들에게 돌아갔다고 여겼다.
대선이나 총선 등으로 지도자들을 뽑아야 하는 우리에게도 공자의 평가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난감한 평가에 대해 정자나 주자 같은 위대한 학자들도 고뇌에 찬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 시대의 바람직한 정치인상은 과연 무엇인가?
# 출전: 『논어(論語)』 「헌문(憲問)」
# 내용소개: 윤훈표(연세대학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