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계시면 멀리 나가 놀지 않으며,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
- 정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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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2-03
씁쓸한 얘기를 들었다. 어느 교육자로 정년(停年)을 하신 할머니의 절망적인 경우였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남매를 키우는데 모든 것을 쏟으며 평생을 살아온 분이었다. 여느 어버이들이 그렇듯이 자식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여인의 신앙대상인 자녀들은 소망하던 대로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두 자녀는 모두 미국의 우수한 대학을 졸업하여 딸은 국내에서 의사교수로 활동하고, 아들은 미국에서 세계적인 과학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들 이력의 일부만 비추어도 “당신은 자식농사에 성공했어…… 저 늙은이 복도 많지!” 하고 부러움 섞인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할머니는 긴 한숨으로 응수하곤 한다. “자식이 세상의 영웅이면 뭐해! 이산가족인데…….”
사실 할머니는 넓은 아파트에 혼자 산다. 그 공간만큼이나 고독은 깊고 깊다. 설날이나 추석 다음 날, 딸가족이 할머니를 방문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멋적게 할머니를 포옹하고, 역시 의사인 사위는 “어머니 자주 못뵈서 죄송해요”하며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다시 고적한 나날이 이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집안에 생기가 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음에 틀림없다. “어머니 저 한국에 왔어요. 학술회의가 있어 급하게 도착했습니다. 스케줄이 빡빡해서 여건이 되면 들르겠습니다.” 아들이 오다니……. 노인은 부산해진다. 그가 예전에 잘 먹던 음식을 떠올리며 장을 보고, 구석구석 집안 청소에, 이부자리 손질에……, 정말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 줄 몰랐다. “아마 이 음식이 싫다면? 저 음식으로? 맵지 않게 해야지? 요리사를 부를까? 차라리 나가서 사 먹일까? 아니야 이 에미의 손맛을 좋아할꺼야!”
그날 밤 아들은 오지 않았다. 전화도 없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딸에게 전화를 했다. “얘, 오빠 연락 없었니?” “잘 모르겠는데.” 며칠 후, 저녁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 여기 공항인데요! 바빠서 뵙지도 못하고 갑니다. 건강하시고요! 또 전화드릴께요. 탈칵, 뚜-뚜-뚜” 노인은 긴 구렁텅이로 버려졌다. 혀꼬부라진 소리로 떠듬떠듬 안부를 묻던 미국 손자의 전화를 받은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아들이 바빠서 그런데…기대하는 내가 망령이지!”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혀 보려고 애를 써 본다.
‘품안에 자식’ ‘병신자식이 효도한다’ 이러한 격언은 만고불변의 진리라 여겨진다. 뭔가 모자라서 시집장가도 못가고, 그저 부모 곁에 빌붙어 사는 자식을 보며 “아이구, 내 팔자야! 저걸 보내야 내가 눈을 감을텐데…….”라고 말은 하지만, 몸져누워 손도 꼼짝하기 싫을 때, 약이라도 사오고 라면이라도 끓여 나눠 먹을 수 있는 피붙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효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촌시대에 부모 주변을 맴돌며 살 수만은 없다. 출장을 가든, 설령 해외지사에 발령을 받아 몇 년씩 부모 곁을 떠난다 해도, 공간적인 거리를 메울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어머니 저, 영국 런던이예요!” “그래! 어쩜 그렇게 소리가 잘 들리니? 옆집 같구나! 밥은 먹었고? 아픈데는 없니?” “걱정 마세요. 모든 것이 편하고 좋아요. 음식도 잘 맞고요. 오늘은 바이어를 만났는데. 잘 풀릴 것 같?틸? 날씨도 괜찮구요……” “그래 내 아들 장하다. 누구에게나 겸손히 대하고, 나쁜 놈들 조심해라. 강도가 총 들이대면 모두 주어버려라! 이불 잘 덮고 자고……”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마음을 안다고 했듯이, 효도는 다분히 경험론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자식이 나의 마음을 몰라줘서 후회를 거듭하다가 부모를 떠 올리게 될 때, 이미 효도 받을 부모는 이 세상에 없다. 그래서 “어버이 살아 계실 때 섬기기를 다하라”는 상투적인 명제로 여지없이 돌아오게 된다.
때론 장성한 자녀를 아이 다루듯 하는 부모에게 “제가 어린애예요!” 하고 짜증어린 항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모의 허튼 훈계에도 긍정적으로 응대하고, 그 마음에 흐뭇한 여운을 드릴 수 있다면, 그런 고민의 여지가 자녀에게 있다면, 공자의 효도지침은 유효할 것이다.
#출전: 『논어(論語)』 「이인(里仁)」
#내용소개: 정규훈(총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