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인은 곤궁하면 넘친다.
- 진성수
- 조회수10921
- 2012-05-14
공자가 도덕정치를 주장하며 천하를 주유(周遊)했을 때, 당시 사람들은 공자를 ‘상가집 개’ 혹은 ‘떠돌이 개’로 비유하며 비난했다. 『사기(史記)』에 보면, 공자 스스로도 “외뿔소도 아니고 범도 아닌데 저 광야에 홀로 떠돈다.(「공자세가(孔子世家)」)”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공자가 중원(中原)을 돌아다니며 유세했던 시기는 그가 ‘천명을 깨달은(知天命)’은 50세 중반 이후였다.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대혼란기에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14년이란 긴 여행 중에 공자와 제자들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온갖 고난을 겪었다. 예컨대 광(匡) 땅을 지날 때 양호(陽虎)로 오해를 받아 죽을 뻔 했다가 변복을 하고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일, 송(宋)나라에서 환퇴(桓魋)라는 폭력단에게 포위되었던 일 등이다. 특히 진(陳)나라 옆을 지날 때에는 많은 제자들과 동행하고 있었는데, 그만 식량이 떨어지고 말았다. ?營?상황을 『논어』에서는 ‘제자들이 병들어 일어날 수 없었다’라고 말한다. 단순히 끼니를 거른 정도가 아니라 병이 날 정도였으니,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다혈질인 자로가 공자에게 불평하듯 말했다. “선생님 같은 군자도 이렇게 곤궁합니까?” 이 말은 스승에 대한 강한 불신과 원망이 속으로부터 터져 나온 것이었다.
공자 일행이 진나라로 길을 떠나기 바로 전에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공자에게 전쟁의 진법(陳法)을 물었다. 그 때 공자는 ‘예(禮)에 관해서는 알지만 군대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대답을 거절한 후 이튿날 위나라를 떠났다. 바로 이 점이 자로가 스승을 불평했던 한 가지 이유였을 지도 모른다. 자로는 위령공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해주고 신임을 얻어 좋은 직책을 받아 정착했더라면 지금의 고난을 피할 수 있지 않았느냐는 원망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달랐다. 공자는 위령공이 무도한 임금이며 모든 관심사가 전쟁에만 집중된 사람이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할 가치도 못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빨리 위나라를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공자가 위령공을 피해 진나라로 향할 때,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의 대부가 초(楚)나라로 가는 공자 일행을 막기 위해 군사를 보내 포위했다. 그 결과 양식이 끊어진 지 7일이 되어 공자 일행은 병들어 죽게 될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이 때 자로가 불만과 원망이 섞인 말로 공자에게 묻는다. “도덕을 갖춘 군자라면 하늘이 지켜주고 사람들이 도와서 곤란을 겪지 말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곤궁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의 삶과 죽음은 명(命)에 달려 있고, 부귀영화는 하늘에 달려있다.(안연-5)” 이 말은 곤경에 처해서도 하늘을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는 군자의 의연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공자는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견뎌내는 사람이 군자라면, 눈앞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를 모면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을 소인’으로 보았다. 공자는 이것을 ‘소인은 곤궁하면 넘친다’라고 표현했다.
살다보면, 평상시에는 전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던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여 차마 하지 못할 일도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공자의 말을 통해 고난에 대처하는 의연한 군자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출전: 『논어(論語)』「위령공(衛靈公)」
#내용소개: 진성수(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 책임연?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