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구>
禮尙往來. 往而不來, 非禮也, 來而不往, 亦非禮也.
<해석>
예는 오고 감을 숭상한다. 갔는데도 오지 않으면 예가 아니며, 왔는데도 가지 않는 것도 예가 아니다.
<내용>
‘헬(Hell)조선’에서 신음하는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 가득하다. 무엇이 우리 사회를 벗어나고 싶은 ‘지옥’으로 만들었을까? 대기업 사주 가족들이 운전기사를 욕하고 때리며 가혹하게 부리는 사건이나 권력기관의 고위직 인사가 권력을 이용해서 인사를 전횡하거나 자의로 예산을 배정하는 일 등이 신문 지상을 장식한 지는 이미 식상한 지 오래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현상이 극소수 재력가와 권력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손님은 왕’이라면서 매장 직원에게 폭언을 퍼붓거나 아파트 입주자 대표가 관리소장을 ‘종놈’으로 모욕하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지성의 상징인 대학 교수가 제자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한 ‘인분’ 교수까지 등장했다. 갑이 을에게, 을이 병에게, 다시 병이 정에게,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이 그보다 못한 위상을 지닌 사람에게 물리적, 상징적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갑질’의 일상화가 사회의 근간을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헬조선을 배태한 이러한 ‘갑질’의 구조를 벗어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예기禮記』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오고 감을 숭상하는 예’로 제시한다. 여기서 ‘오고 감[往來]’이란 ‘시혜’[施]와 ‘보답’[報]의 선순환을 뜻한다. ‘수작’(酬酌)이란 옛말에 잘 나타나듯이, 술자리에서 예의는 주거니 받거니 하는 왕래로 나타난다.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올리면 손님도 주인에게 답례로 잔을 권하고, 손님에게 잔을 받은 주인이 다시 손님에게 술을 올리는 식으로, 예는 일방적인 관철이 아니라 상호적인 왕래인 것이다. 구조화된 ‘갑질’의 일방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왕래’를 숭상하는 예의 호혜성(reciprocity)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위에서는 국민들이 내는 세금을 받으면서도 국민들을 개, 돼지로 비하함으로써 ‘시혜가 갔으나 적절한 보답이 없는’ 관리가 판치고 있는 반면, 아래에서는 저녁을 반납하고 열심히 일했으나 정리해고로 내몰리는 직장인들은 ‘보답을 했으나 시혜가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 모두 ‘갔는데도 오지 않거나’ ‘왔는데도 가지 않는’ 무례한 사회의 상징적 증상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 시혜와 보답이 오고 가는 아름다운 선순환이 사라진 자리는 정치꾼과 장사치들의 수작질 혹은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라는 어두운 거래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강자가 약자를 삼키는 약육강식의 밀림일 뿐이다.
이렇듯 정부와 시장에서 벌어지는 어두운 악순환을 떨쳐내고 시혜와 보답이 시너지(synergy)를 일으키는 사회를 만들려면 왕래를 숭상하는 ‘예’의 호혜성을 회복해야 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조선시대에 일방적 권력작용을 비판적으로 견제했던 선비들처럼, 오늘날 우리는 호혜적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 비판적 성찰과 실천을 마다하지 않는 시민들이 필요하다. 보답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시혜를 기꺼이 감당하는 ‘덕’(德)을 실천하는 최선의 목표까지는 이루지 못할 지라도, 시혜와 보답의 호혜적 선순환을 정립하는 예의 문화는 갑질이 일상화된 ‘헬조선’을 극복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출처>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
<집필자> 박종천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