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구>
知者行之始, 行者知之成
<해석>
앎은 실천의 시작이고, 실천은 앎의 완성이다
<내용>
아는 대로 실천한다면 지금보다 개인은 더 행복하고 공동체는 더 발전할 것이다. 알고 있지만 그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앎과 실천의 분리는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로 줄곧 풀고자 했던 문제이다. 철학자들도 앎과 실천의 불일치가 도대체 왜 발생하는지 그 원인을 찾아서 둘이 일치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려고 했다. 어떤 이는 사람의 의지가 약해서 알고 있는 바를 끝까지 실천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어떤 이는 제대로 안다면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이(李珥, 1536~1584)는 뜻을 굳건하게 세워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은 입지(立志)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BC 399)는 사람이 무지하여 해야 하는 바를 실천하지 못하므로 제대로 아는 활동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많이 사상가들이 나름대로 앎과 실천이 하나로 결합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앎과 실천의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고 있다. 앎은 사람이 머리로 생각하고 추론하여 찾아낸 성과라면 실천은 사람이 시간과 공간의 틈바구니에서 몸을 움직여서 맺는 결실이다. 즉 둘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로 되기가 어려운 사정을 지니고 있다. 아마 이 때문에 주희는 “뭔가를 알아야 그에 맞게 실천할 수 있다”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했다.
훗날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은 앎과 실천이 서로 다른 별도의 것이라거나 “알아야만 실천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우리가 선지후행을 받아들이게 되면 “끝까지 알려고 하다가 결국 하나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낳는다고 보았다. 나아가 앎과 실천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 다른 지점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안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그것을 아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가는 출발점이다. 예컨대 “거짓말이 나쁘다”는 말은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또 행한다는 것은 앎을 현실의 다양한 관계와 상황에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종착점이다. 예컨대 효도는 그 가치를 알고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실제로 행동할 때 덕목으로서 의의를 갖는다.
왕양명은 앎과 실천은 동전의 양면이나 고리의 다른 지점으로 보아야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게으른 박학다식꾼과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고 실천하는” 맹목적 행동주의자를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앎과 행동이 변증법적으로 상호 연관된 특성을 이해한다면 21세기에도 해야 할 일을 척척 해내는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시민이 늘어날 것이다.
<출전> 왕양명(王陽明), 『전습록(傳習錄)』
<집필자> 신정근/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소장